제1장
“남연아, 남편이 다른 집에서 잠을 잔다는 데 너는 잠이 오니? 그 사모님 자리에서 내려올까 봐 걱정도 안 돼?”
별장의 안방.
진해영은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고 고남연은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대꾸했다.
“어머니, 오늘은 또 어느 불여우인데?”
결혼 생활 2년 동안 밖으로는 여자들이 줄을 서서 자리를 비키라고 하고 시어머니는 하루가 멀다고 가서 바람난 남편 잡으라고 닦달하는 것에 고남연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다만 매번 허탕만 칠뿐 윤북진의 실질적인 증거는 잡을 수가 없었다.
“호텔 방 번호 보냈으니까 가서 잡아와.”
잠시 멈칫하던 진해영이 다시 말했다.
“너도 참, 계속 이렇게 북진이 내버려두면 나도 더는 도와줄 수 없어.”
내버려둬?
신경을 쓰고 싶어도 윤북진이 신경을 쓸 기회를 줘야 말이지!
2년 동안 집에 들어온 횟수는 손에 꼽았고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기에 바빴다.
윤북진이 자신을 무슨 전염병 피하듯 피하는 데 어디서 뭘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다만 그녀와 윤북진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윤북진도 그녀에게 잘해주고 양보해 주고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그 일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눈을 감고 잠시 침묵하던 고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느릿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어머니. 주소 보내주세요.”
30분 뒤.
고남연이 호텔 지배인에게서 키를 건네받았을 때 주정연도 때마침 도착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같이 스위트룸 앞에 섰다.
카드키로 방문을 열려던 고남연은 분명 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마음이 순간 불쾌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진작에 익숙해졌다지만 그래도 자신의 것인데 남이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니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방문이 열리고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넷.”
“….”
안에는 두 사람이었다.
불륜 현장 습격이라고 하지 않았나? 왜 마작이나 치고 있는 거지?
열 남자 옆에 아가씨가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 윤북진은 입에 담배를 문 채 오른손으로는 마작을 매만지고 있었고 여지수는 아영을 부리며 그의 팔짱을 낀 채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은 하나같이 A시의 유명 인사들로 가장 뛰어난 남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윤북진은 여전히 가장 눈에 띄는 남자였다. 이목구비는 선명하고 콧대에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머리는 무심하게 뒤로 넘기고 있었다.
젠틀하면서도 어딘가 날티가 나서 몇 번을 봐도 놀라웠다.
그의 외모로는 돈을 주고 상대를 찾지 않아도, 수많은 여자가 기꺼이 그를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하려 했다.
그가 윤정 그룹을 인수한 뒤 2년 만에 A시의 가장 큰 기업으로 키워낸 탓에 이제는 모두가 그를 공경했다.
만약 그가 예전 같았다면, 만약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윤북진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편일 지도 몰랐다.
윤북진은 다 좋았지만, 그녀에게만 나빴다.
입구를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 있던 서경백은 고남연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웃으며 인사를 했다.
“형….”
‘수님’ 소리가 다 나오기도 전에 윤북진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내리꽂혀 서경백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누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
고남연은 호탕하게 웃으며 느긋하게 들어갔다.
“보고 싶어서 왔지!”
“어! 형….”
몰래 윤북진을 흘깃 쳐다본 서경백이 말했다.
“누나, 그런 농담하지만 제가 어떻게 받아쳐요.”
말할 것도 없었다. 형 잡으러 오는 게 분명했다.
이 2년 동안 그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저렇게 예쁜 아내를 집에 내팽개친 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니, 대체 형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남연이 오늘 밤 입은 것은 무릎을 넘는 기장의 브이넥 블랙 원피스였다. 폭포같이 긴 머리카락은 무심하게 늘어트렸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서 거부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길쭉하게 뻗은 다리로 테이블 앞에 온 그녀의 모습에 방 안에 있던 아가씨들은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미모에 놀라 버린 것이다.
고남연을 보자 여지수는 윤북진의 어깨를 놓아주며 인사를 건넸다.
“남연아.”
그녀를 무시한 고남연이 윤북진의 어깨를 흘깃 쳐다보자, 여지수가 황급히 해명했다.
“북진이가 방금 이겼는데 내가 다 기뻐서, 그래서…”
여지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남연은 손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여지수, 다음에는 네 손을 자를 거야.”
“남연아, 내 말 좀….”
여지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연아, 아파. 너무 세게 잡았어.”
여지수의 목소리에 윤북진은 고남연을 차갑게 쳐다봤다.
“안 놓으면 잘리는 건 네 손이 될 거야.”
그 틈을 타 고남연을 뿌리친 여지수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손목을 문지른 여지수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북진아….”
고개를 돌려 그녀를 흘깃 본 윤북진은 무감정하게 말했다.
“뭘 겁내는 거야? 앉아.”
서경백 옆에 있던 여자는 심상찮은 분위기에 호기심이 동해 윤북진에게 물었다.
“대표님, 이분은 누구세요?”
짙은 연기가 그의 콧대에 걸린 금테 안경 주위에서 흩어졌고 윤북진은 담뱃재를 툭 털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야.”
그 말에 서경백을 비롯한 모두가 얼어붙었다.
모르는 사이?
분명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다. 그것도 23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테이블 옆에 서 있던 고남연은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다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윤북진의 앞으로 가 조용히 귀띔했다.
“두시 반이야, 정리해야지.”
오른손에는 담배를 든 채 윤북진은 여전히 우아하게 말했다.
“십삼요.”
마치 고남연을 공기 취급하는 태도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여지수는 얼른 분위기를 풀었다.
“남연아, 남자는 원래 놀길 좋아하잖아. 경백이도 다들 있는 자리니까 사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고남연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너 지금 가서 결혼이라도 하고 올래? 네 남편도 내가 좀 놀게 빌려주든지.”
“….”
여지수는 고남연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을 마친 고남연은 서경백의 앞으로 가 손가락을 세워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경백아, 너 일어나.”
서경백이 고개를 들었다.
“누나도 하게요?”
그 옆, 고남연과 함께 불륜 현장을 잡으러 와서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주정연이 별안간 웃으며 말했다.
“왜? 남자만 놀 수 있고 여자는 못 노나 보지?”
멋들어진 숏컷에 화려한 꽃무늬 셔츠 차림이라 얼핏 보면 남자라고 착각할 정도인 그녀는 고남연의 절친이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고남연을 쳐다봤다.
“남연아, 이 호텔 바에 있는 녀석들 꽤 괜찮다던데 몇 명 불러줄까?”
서경백이 양보해 준 의자를 끌어당긴 고남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았다.
“그래!”
고남연의 대답에 윤북진의 시선이 드디어 그녀에게로 향했다.
고남연은 아예 무시한 채 서경백의 패로 게임을 이어갔다.
“삼통.”
얼마 지나지 않아 잘생긴 남자들이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왔고 주정연은 제일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를 불러 고남연의 시중을 들라고 시켰다.
미션을 받은 남자는 배시시 웃으며 고남연의 곁에 앉았다.
“누나, 저 기운이 엄청 좋아요. 제가 옆에 있으면 무조건 벌 거예요.”
그 말에 고남연은 기뻐하며 대답했다.
“내가 이기면 크게 한 턱 챙겨줄게.”
아니나 다를까, 몇 번의 게임이 더 이어지는 동안 내내 고남연 혼자서만 이기고 있었다. 가장 열받는 부분은 다른 사람이 패를 던지면 가만히 있으면서 윤북진이 패만 내면 패를 맞춰 이겼다.
그러니 윤북진의 표정이 어떨지는 눈에 훤했다.
그 사이 고남연이 또다시 십삼요를 외치자 윤북진은 들고 있던 마작패를 내동댕이쳤다.
차가운 얼굴은 주위 공기를 삽시간에 얼어붙게 했다.
그런 윤북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작을 기계로 밀어넣으며 패를 섞던 고남연이 웃으며 조롱했다.
“윤 대표님, 패배를 인정 못 하시네! 못 하겠으면 집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요.”
고남연이 그에게 집에 가서 자라고 하자 윤북진이 웃으며 말했다.
“나랑 자려고? 고남연, 꿈이 너무 크네.”
윤북진의 말에 여지수는 조심스럽게 고남연을 흘깃 쳐다보며 속으로 잠시 생각했다.
‘이번에는 진짜 이혼할까?’
윤북진의 조롱에 고남연은 이긴 돈을 옆에 있던 남자에게 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주는 팁.”
고남연이 현금을 주자 남자애는 잔뜩 신이 나서 받았다.
“감사합니다, 누나.”
방 안에 있던 다른 아가씨들의 두 눈이 부러움에 반짝였다.
고남연의 돈을 받은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고남연에게 말했다.
“누나, 제가 더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오늘 밤에 저랑 같이 나가실래요?”
남자애의 말에 서경백이 물고 있던 담배가 탁하고 떨어졌다. 방안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동시에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순식간에 방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정도로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