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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바람둥이

이서아는 차를 세우고 다가갔다. “대표님.” 길가의 어두운 가로등이 한수호의 차가운 옆모습을 비추었다. 그는 이서아를 보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이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을 발견하고는 주먹밥을 산 후 바로 먹을 수 있게 데우기까지 했다. “저녁도 얼마 안 드셨는데 이거라도 드세요. 그러다 또 속 버리겠어요.” 한수호는 그녀를 힐끗 보다가 주먹밥을 받았다. 그러자 이서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의 말씀에 불만이 있어도 그렇게 대들어서는 안 되죠. 회장님 고혈압도 있잖아요. 작년 연말에 병원에도 입원하셨고...” 한수호는 싸늘하게 웃더니 주먹밥을 버렸다. 그러고는 이서아를 잡고 차 문을 열어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이서아는 어지럽기만 했다. 이서아가 한껏 예민한 얼굴로 한수호를 노려보았다. “대표님! 여기서는 안 돼요, 대표님!” 한수호는 그녀가 꼼짝 못 하게 두 손을 머리 위에 눌렀다. 목소리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이 비서도 이젠 거절할 줄 아네? 너 성격이 좋아서 사람들이 다 널 좋아하잖아.” 뒷좌석에 갇힌 이서아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숨결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물었다. “다 좋아하다니요. 대표님은 절 싫어하잖아요... 백인하 씨가 그렇게 좋아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잠깐 관심 있는 거예요?” 백인하에 대한 한수호의 마음이 그저 관심 정도인 줄 알았다. 다시 말해 한수호의 스타일이어서 그냥 잠자리나 하고 싶은 정도. 하지만 그날 밤 한수호는 백인하가 혼전순결주의라고 했다. 혼전이라는 건 결혼할 마음도 있다는 건가? 아무래도 이서아가 또 잘못 판단했나 보다. 지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녀는 두 달 동안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고 이번에는 왠지 한수호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그녀는 묻지 않아도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더라면 모두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3년 전에 한수호가 살려준 후로 이서아의 마음은 한없이 커져만 갔다. 한수호의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자존심 버리고 도구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한수호가 아니었더라면 3년 전에 그 사람들의 손에서 철저히 망가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하나를 얻으면 다른 걸 더 원했다. 이서아는 한수호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더 많은 걸 욕심냈지만 아쉽게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다정함, 편애, 사랑, 결혼 모두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결국 그녀는 참다못해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백인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걸까? 그것도 결혼하고 싶을 만큼?’ 한수호는 아무 대답 없이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침묵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서아가 피식 웃었다. “인하 씨랑 결혼하고 싶으면서 왜 나랑 잤어요? 이건 그냥 바람둥이잖아요.” “넌 그냥 도구잖아. 내가 바람피운 게 아니라...” 그런데 한수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이서아는 그의 뺨을 빠르고 정확하게 내리쳤다. 짝! 힘이 그리 세진 않았지만 이서아도 자신이 그를 때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가까이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한수호는 처음으로 누구에게 맞아보았다. 그것도 그가 가장 무시했던 여자에게 말이다. 하여 한수호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이서아는 자신을 도구라고 비웃긴 했지만 한수호가 경멸 섞인 말투로 그녀를 도구라고 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한수호를 때린 걸 후회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심하게 화가 나면 온몸이 다 떨리는구나.’ 한수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서아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와 옷깃을 잡아당기며 몸을 일으키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려.” 이서아는 이를 꽉 깨물고 옷을 정리한 후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기도 전에 한수호는 액셀을 밟고 그대로 가버렸다. 멀어져가는 차를 쳐다보던 이서아는 피곤함이 점점 밀려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에 누군가 그녀를 내쫓기라도 하듯이 일이 바로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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