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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카톡으로 연락해줘요.” 최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를 작성하는 속도가 아주 느릴 겁니다.” “그러면 음성 문자거나 통화 기능을 사용해 주세요. 설마, 카톡을 사용할 줄 모르는 건 아니죠?” “... 전 최대한 아라 씨와 연락하지 않고 지낼 생각입니다.” 지켜보고 있던 최준태는 화를 내며 손자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하지만 영혼이었던지라 아무리 세게 때려도 최현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손은 최현우의 머리를 통과했다. 고아라는 이런 장면을 많이 봤었기에 웃지 않을 수 있었다. “손주 며느리야, 이놈 말은 무시하거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이놈한테 연락해. 이놈이 분명 도와줄 거다. 이놈은 말은 차갑게 하지만 속은 의외로 따듯한 놈이거든. 책임감이 아주 강한 아이니까 너랑 부부가 된 이상 너를 방치하진 않을 거다.” 고아라는 딱히 최현우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전 최현우 씨를 귀찮게 할 생각 없어요. 최현우 씨의 시간은 아주 귀하잖아요. 별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봐도 되죠? 더는 최현우 씨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네요.” “네, 가보세요.” 고아라는 물을 두어 모금 마신 뒤 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최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최준태는 또 한 번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못난 놈! 이게 무슨 태도야!' 고아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최준태도 따라 나왔다. 그는 고아라를 따라가며 말했다. “손주 며느리야, 저놈 행동을 굳이 마음에 담아둘 것 없단다. 저놈은 어릴 때부터 저랬어. 아주 건방지지. 내가 살아있을 때도 얼마나 건방지던지 정말로 볼 때마다 뒤통수를 후려주고 싶더구나.” “할아버지께선 그래도 최현우 씨를 아끼고 계시잖아요. 저도 알아요, 말뿐이라는 것을요.” 고아라는 알고 있었다. 최준태가 최현우를 얼마나 아끼는지. “... 현우 할미가 때려줄 것이다. 네가 현우 할미한테 일러바치면 분명 시원하게 때려줄 거야. 참, 현우 할미는 아직 살아있단다. 아주 쌩쌩하지.” “할아버지, 전 딱히 화나지 않았어요. 그러니 절 위해 화를 내주실 필요 없으세요.” 그녀는 최현우의 할머니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현우와 오늘 오전에 혼인신고를 마친 것도 사실은 최현우의 할머니 재촉을 못 이겨 빠르게 진행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우가 널 대하는 태도가 너무 좋지 않구나.” 고아라는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저랑 현우 씨는 오늘 오전에 급하게 결혼한 거예요. 오늘 오전 혼인신고 하기 전까지 서로가 누군지 몰랐어요. 하지만 최현우 씨는 하늘에서 아내가 뚝 떨어지기를 바랐고, 저도 하늘에서 남편이 뚝 떨어지기를 바랐으니 마침 목적이 같은 저희가 대충 인사를 하고 혼인신고를 한 거예요.” “최현우 씨가 저러는 건 정상이에요. 고작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콩달콩 콩을 볶고 있겠어요. 그게 더 비정상적인 행동이죠. 이런 상황에서 만약 최현우 씨가 저한테 사랑 고백을 하면, 할아버지께서는 믿으시겠어요?” 최준태는 고개를 저었다. 고아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보세요, 귀신인 할아버지께서도 안 믿으시잖아요.” 최준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손주 며느리야, 네 집은 어디냐?”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우진산이요.” “듣기만 해도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구나.” 그러자 고아라가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 전 세상과 담쌓고 사는 게 아녜요. 그냥 돈이 없는 거지일 뿐이죠.” “넌 우리 집안의 손주 며느리다. 그런데 어떻게 거지란 말이냐. 내가 보기엔 넌 사람도 참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복이 절로 굴러들어오는 아이인 것 같구나. 우리 현우랑 천생연분이지. 아주 잘 어울려. 돈이 부족하면 이 할애비한테 말하렴. 이 할애비가 줄 테니까.” 최준태는 이내 이마를 ‘탁' 쳤다. 그러면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런, 내가 너랑 대화하다 보니까 이미 죽은 몸이라는 걸 잊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현우 꿈속에 나타나 너한테 은행 카드 한 장이라도 주라고 해야겠다. 현우 개인 자산만 몇조가 되니 최씨 집안 재산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지.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현우가 가진 돈 펑펑 쓰렴.” “감사해요, 할아버지. 하지만 전 괜찮아요. 전 제가 직접 벌어서 쓰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얼른 돌아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 다리가 사라지고 말 거예요.” 고아라는 말하면서 최준태의 두 다리를 가리켰다. 종아리 부분이 이미 투명하게 변해 버렸다. 최준태가 깃들어 있던 손목시계와 점점 멀어졌기 때문으로 보였다. 자세한 건 고아라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모든 일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최준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 “어이쿠, 세상에! 또 사라졌네. 손주 며느리야, 다음에 또 보자꾸나.” 말을 마친 최준태는 얼른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손목시계와 점점 가까워져서 그런지 그의 종아리는 점차 다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고아라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최현우가 경호원을 이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최준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손목시계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최현우의 뒤를 따라가던 이현은 입술을 달싹였다. 고아라가 떠난 것을 확인한 최현우는 고개를 돌려 이현을 보았다. 이현은 순간 긴장해졌다. “도련님, 고아라 씨가 방에서 나오고 나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계속 혼자 누구랑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최현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말이다. “현아, 넌 ‘혼잣말'이라는 단어를 안 배웠니?” “...” 이현은 고아라가 혼잣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꼭 정말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두 눈 크게 뜨고 봐도 고아라의 곁엔 다른 누군가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현의 말에 최현우는 방금 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에게 물 한잔 따라주러 간 사이 고아라는 누군가와 대화하듯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방엔 그와 고아라, 둘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혹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건가?' ‘아니면 혼잣말하는 게 취미인가?' 그는 할머니인 김여옥과 말다툼을 하고 고아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혼인 신고한 것을 후회했다. 비록 원하는 대로 빠르게 이혼할 수 있지만 이혼하기만 하면 김여옥은 다시 결혼하라며 잔소리를 해댈 것이었다. 그는 이미 김여옥의 잔소리에 지쳐있던 상태였다. 어차피 그는 고아라와 결혼한 사실을 숨기기로 했고 고아라가 어디에 사는지 묻지 않았다. 고아라도 그에게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었고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설령 그녀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이 일로 할머니의 잔소리를 그만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최현우는 머릿속에서 후회라는 단어를 지웠다. ‘후회 안 해!' 그가 후회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절대로 후회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센트롤 호텔에서 나온 뒤 고아라는 빠르게 차를 몰고 떠났다. 어느새 우진산으로 출발했다. 그녀에겐 아직 4000자의 글을 써야 하는 임무가 남아 있었다. 아마 오후 4시 즈음에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집중해서 열심히 글을 쓴다면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업로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녁엔 고양이를 안고 티브이를 보면서 휴식하면 되었다. 그러나 길은 꽉꽉 막혀 있었다. 고아라가 이은비의 본가로 왔을 땐 이미 저녁 6시였다. 강정아는 마침 텃밭으로 가려다가 막 도착한 고아라를 보곤 얼른 비료 통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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