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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고아라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몰라요. 하지만 혼인신고 하면 누군지 알겠죠. 안 그래요? 남편 씨?” 최현우는 묵묵부답했다. 상대방이 자신한테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쯤은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 20분 전까지만 해도 둘은 생판 모르는 남남이지 않은가? 그런데 결혼할 생각을 어찌했단 말이지? 얼굴도 예쁘장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 멀쩡한 사람이 낯선 남자와 초고속 결혼을 하겠다니? 설마 그녀도 집안 어른들의 결혼 강요에 시달려 자기처럼 구청에 와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건가? “그쪽도 주민등록증 있어요?” 고아라의 질문에 최현우는 이를 악물더니 대답했다. “네.” 비록 할머니의 화를 돋우려고 찾아오긴 했으나 이왕 일을 저지른 김에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주민등록증까지 챙기긴 했다. “그럼 혼인신고 하러 갈까요?” 최현우는 또다시 침묵했다.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차에 앉아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사람은 본인이지 않은가? 이제 정말 적임자가 제 발로 찾아온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는 직접 내뱉은 말은 무조건 지키는 편인데... 제일 중요한 점은 혼인신고하고 나면 할머니의 결혼 강요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단 몇 분 사이에 최현우는 결론을 내렸다. 고아라가 최현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최현우는 그녀의 손길을 피해 다리를 움직여 구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고아라는 피식 웃더니 재빨리 뒤를 따랐다. 그녀의 육감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다. 결국 초고속으로 결혼할 남자를 만나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구청에 들어섰다. 혼인신고 하러 온 커플은 얼마 안 되었지만, 이혼하러 온 부부들은 대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최현우는 길게 늘어선 행렬을 바라보며 속으로 자신도 곧 이들 중 한 명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곧장 혼인신고 창구로 향했고, 잘생긴 남자를 발견하는 순간 직원이 열정적으로 안내하며 우선 예비부부에게 축복의 인사부터 건넸다. 최현우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고, 고아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내 퉁명스럽게 지갑을 꺼내더니 주민등록증을 직원 앞에 내려놓았다. 옆에 나란히 앉은 고아라도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열과 성의가 넘치던 직원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혼인신고 하러 온 커플치고 다정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남자는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실례지만 혹시 자의에 의한 결혼이 아닌가요?” 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최현우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직원의 시시한 질문에 대답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만약 자의가 아니라면 이 자리에 그를 앉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고아라가 미소를 지었다. “자의 맞아요.” 직원의 시선은 다시 최현우로 향했다. 곧이어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녀를 독촉하는 듯 짜증 섞인 쌀쌀맞은 말투가 들려왔다. “좀 빨리 처리해 주시겠어요? 워낙 바쁜 몸이라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직원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어쨌거나 본인들이 원한 결혼인 이상 절차에 따라 처리하는 게 곧 그녀의 일이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신고를 완료했을 때 이미 30분이 지난 뒤였다. 구청에서 나온 고아라의 손에 혼인신고서가 있었고, 조금 전 무인 사진기에서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낯선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표정이 한결 자연스러웠다. 반면, 옆에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어색했다. 얼핏 보기에는 꼿꼿이 앉은 듯싶었으나 실상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만약 간간이 이어지는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좀비와 사진을 찍는 줄 알았을 것이다. 이내 고아라는 혼인신고서를 작은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두 사람은 밖에 나와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최현우는 여전히 앞에서 걸어갔고, 고아라가 그의 뒤를 따랐다. 구청을 벗어나 부부는 각자 자신의 차로 향했다. 고아라는 차 문을 열고 올라타 시동을 걸더니 그대로 가 버렸다. 이때, 김강수가 고개를 돌려 용기를 내어 물었다. “도련님, 정말 그 여자랑 혼인신고 하신 거예요?” “네.” 김강수는 할 말을 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도련님한테 초고속으로 결혼하는 일이 생기다니?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죠. 차에서 내린 적이 없는데도 마누라가 생겼잖아요. 그에 비하면 혼인신고가 뭔 대수입니까? 나중에 아무 때나 이혼하면 그만이죠.” 이혼남이라는 타이틀 따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최현우는 결혼 생각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김여옥이 필사적으로 결혼을 강요하며 인생 대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매일 같이 수백 번의 맞선을 주선하며 개나 소나 다 소개해줬다. 가끔 자신을 쓰레기 수거장이라도 취급하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작은 사모님은 어느 집 출신이래요?” 나중에 친정 식구라도 마주치면 적어도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잠깐의 침묵이 흐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라요.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출발하시죠?” 혼인신고서에 고아라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최현우는 들여다보지도 않았기에 깜짝 결혼한 아내가 누군지 몰랐다. 김강수는 더 이상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둘러 차를 몰았다. 속으로는 혼인신고하고도 아내 이름조차 모르는 남자는 이 세상에 최씨 가문 도련님밖에 없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퀸즈 그룹에 돌아온 최현우는 사옥에 들어서자 김여옥을 마주쳤다. 올해 여든이 된 그녀는 워낙 관리를 잘해서 신체도 건강하고 기껏해야 60대 초반처럼 보였다. 단정한 옷차림은 고상하면서 소탈했고, 표정은 인자함이 묻어났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시력이 저하되어 금테 노안 안경을 쓰고 있었다. 김여옥을 발견한 최현우는 우뚝 멈추더니 그제야 발걸음을 옮겨 성큼성큼 다가갔다.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정말 손자며느리를 얻었는지 확인하러 왔어.” 최현우의 안색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고, 할머니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김여옥은 손자의 손을 탁 쳐내고 뒤돌아서 안으로 걸어갔다. 최현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 몇 분 후, 사옥 꼭대기 층 대표실. 최현우는 김여옥에게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따라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맞은편에 앉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물 드세요.” “고작 물 한 잔이 웬 말이냐? 디저트 같은 것도 없어?” 최현우는 김여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단 음식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사무실에 간식이나 디저트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죠.” 김여옥이 구시렁거렸다. “나중에 달달한 거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네 할아버지처럼 될 텐데, 뭘!” 이 사무실에 최준태가 나타나는 일은 더는 없을 테니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도 물 건너간 셈이다. “현우야, 솔직하게 얘기해 봐. 대체 어떤 아내를 원하는 거야? 할머니한테 말만 해준다면 무슨 수를 쓰든지 네 요구에 딱 부합되는 여자를 찾아줄게.” 최현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혼인신고서를 꺼냈다. 이내 펼쳐 보자 그제야 배우자 칸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 있는 사진에서 청순하고 귀여운 외모와 생기가 넘치는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허리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를 가진 여자를 발견했다. 곧이어 그는 혼인신고서를 김여옥 앞에 내려놓았다. 이를 발견한 김여옥은 깜짝 놀라 서둘러 집어 들더니 자세히 들여다보았고, 한참 동안 뒤적거리다가 손자에게 물었다. “진짜 신고서 맞아? 설마 사람 찾아서 가짜로 만든 건 아니겠지?” “정 못 믿겠다 싶으면 구청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시면 되잖아요. 만약 가짜로 만들 거면 굳이 오늘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진짜라는 뜻인데... ‘맙소사! 이 자식이 진짜 아내를 얻어왔단 말인가?’ “현우야, 너 설마 차에서 내렸니?” 분명 그녀한테 차에 앉아 1시간 동안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내리지도 않고 여자를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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