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아라야, 비록 예기치 않은 결혼이지만 너에게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란다.”
고정태는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산에서 내려온 고아라는 산기슭과 가장 가까운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이는 3층짜리 단독 주택으로 호화로운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30평이 넘는 널찍한 마당은 시멘트 바닥이 깔려 있어 농번기에 곡물을 말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주택 옆에 차고도 지었는데 평소에 집주인이 타고 다니는 BMW 자동차를 주차해 놓았다.
농번기가 아닌 9월은 마당이 텅텅 비어 보통 주차하는 데 많이 쓰인다.
현재 마당에는 세 대의 차가 있는데 그중 흰색 차량은 고아라의 소유였다.
우진산은 산길이 좁아서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했고, 차가 지나다니기 힘들었다. 게다가 길을 트려고 하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했기에 고아라 사제가 감당할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차를 다른 사람의 집에 장기간 주차해두고 매달 소정의 주차비를 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집안에서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바로 이은비의 어머니 강정아였다.
이내 고아라를 발견하는 순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라야, 외출하려고?”
“네, 시내에 볼일이 좀 있어서...”
사부님이 아닌 사람한테 굳이 혼인신고 할 거라는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강정아는 문을 열고 환하게 웃었다.
“조금만 일찍 내려왔더라면 우리 은비랑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어젯밤에 집에 왔는데 아침 일찍 운전해서 시내로 출근하러 갔어.”
이은비와 고아라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로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지만 왕래가 잦지 않아 절친까지는 아니었다.
둘은 친해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타입에 속했다.
물론 이은비가 곤경에 처해 도움을 청한다면 고아라는 발 벗고 나설 것이며, 처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평소에는 서로 간섭하는 일이 없으며 그 흔한 채팅조차 안 했다.
“어젯밤에 얘기해주지, 은비가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내려와서 술이나 한잔했을 텐데.”
고아라는 술을 좋아했다.
비록 주량이 좋은 편도 아니지만 술이라면 환장했다.
두 잔까지는 기분 좋게 마셨고, 다만 한 잔만 더 마셔도 최대치를 넘어서 무조건 취했다.
고아라가 마당에 들어서서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귀신을 목격했다.
다름 아닌 한 달 전에 돌아간 이은비의 할머니였다.
이미 귀신은 적응된 덕분에 정금자를 보고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살갑게 말을 걸었다.
“가족들이 다 잘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강정아는 자신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시름이 놓이는구나.”
그러나 동갑내기 딸이 아직 미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강정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단지 오누이가 약속이라도 한 듯 결혼하기 싫다고 하니 골치가 아파 죽겠어. 우주 이 자식은 벌써 29살인데 여자친구도 없고, 은비도 너랑 또래인데 연애하는 모양새가 안 보이네.”
고아라는 강정아의 넋두리를 뒤로 하고 차에 올라탔다. 이내 안전벨트를 매면서 위로를 건넸다.
“인연은 하늘이 정해주는 거죠. 오빠랑 은비가 결혼하지 못한 건 아직 때가 아니라서 그래요. 괜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 말을 듣자 강정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네 사부님한테 점이나 봐 달라고 산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고아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줌마,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이내 강정아에게 작별하고 입구에 서 있는 할머니 귀신을 향해서도 인사를 건넸다. 정금자는 인자한 얼굴로 연신 손을 흔들었다.
한 달 전에 돌아간 그녀는 귀신이 되어 가끔 집으로 찾아왔다. 어쨌거나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이 그립기 마련인지라 얼굴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면 몰라도 지금처럼 자주 방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아라는 차를 몰고 마당을 벗어났다. 강정아는 대문을 닫고 뒤돌아서 집으로 걸어가다가 몇 발자국 안 되어 멈추어 섰다. 이내 집 문을 바라보며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라가 방금 입구를 향해 인사하는 것 같던데 누구한테 손을 흔든 거지?”
지금은 그녀가 집에 혼자 있지 않은가?
“그냥 무심코 했나 보지.”
강정아는 혼잣말로 말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서자 정금자도 뒤돌아서서 따라갔다.
집 안에 들어와서 TV 보러 갔지만 이미 죽어서 실체가 없는 영혼이 대체 무슨 수로 TV를 켜겠는가? 결국 며느리가 대신 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강정아는 주방으로 향했고, 그녀도 마지못해 따라갔다.
어쨌든 며느리가 TV를 켜주지 않는 이상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강정아는 고아라가 떠난 이후로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정금자가 강정아를 따라다닐 줄은 꿈에도 모르는 고아라는 차를 몰고 마을을 가로질러 읍내를 벗어나 인하시로 가는 국도에 올라탔다.
곧이어 교차로에서 방향을 틀어 몇 분 만에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운명의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속도로를 타면 마을에서 인하시까지 차로 40분 정도 걸렸다.
그녀는 어차피 미래의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애초에 구청으로 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정해진 일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일 테니까.
구청 입구에서 죽치고 있으면 곧 결혼하게 될 키 큰 남자를 반드시 마주칠 것이다.
한 시간 뒤, 인하시 구청.
고아라는 주차하고 나서 내리지도 않고 차 안에서 혼인신고 하러 찾아오는 커플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중에서 이혼하러 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러 온 커플은 결혼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발을 들이는 꼴이고, 이혼하러 온 부부는 드디어 탈옥하는 셈이다.
안에 있는 사람은 나가고 싶어 하고, 밖에 있는 사람은 들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라니.
이때,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옆에 멈춰서더니 운전자가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고아라는 뒷좌석의 창문을 내리는 남자를 발견했다. 곧이어 잘생긴 얼굴이 나타났고,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알아차린 듯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고, 고아라의 뛰어난 시력 덕분에 유난히 차갑고 싸늘한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남자는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고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풍겼다.
심지어 차창을 사이에 두고도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검은색 정장을 보는 순간 고아라의 머릿속에 예견했던 장면이 떠올랐고, 어쩌면 눈앞의 남자가 결혼 상대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고, 일단 타깃이 맞는지 지켜볼 심산이다.
이때, 벨 소리가 울리자 전화가 온 줄 알고 휴대폰을 꺼냈지만 잠잠했다.
곧이어 옆 차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고아라는 그제야 상대방의 벨 소리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 재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이미 구청에 있어요. 만약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생기면 손자며느리를 데리고 갈게요. 1시간 뒤에 아무도 없으면 회사로 돌아갈 테니까 다시는 결혼을 강요하지 마세요.”
휴대폰 너머로 버럭 외치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현우! 여자친구도 없는 놈이 구청에 가서 누구랑 결혼한다고? 마누라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