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입만 열면 오빠, 오빠. 누가보면 평생 오빠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줄 알겠네.’
차현승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의자에 앉아 장우현을 노려보았다.
그는 콩이의 옆에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그 말에 다른 친구들도 다가와 콩이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간식을 주는 사람도 있고 요구르트 주는 사람도 있고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본 차현승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쳇. 저 아이가 뭐가 좋다고 난리인 거야? 좀 예쁜 것 빼고는 말도 못하는데… 틀림없이 엄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아첨하는 게 분명해.’
잠시 후, 강서현은 물건을 챙기고 콩이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콩이야. 엄마는 이따가 회의하러 가야 해. 오빠랑 언니들이랑 수업을 듣고 있어. 말썽을 피우면 안 돼. 알겠지?”
그 말에 콩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제가 잘 돌볼게요.”
장우현은 책임감 있게 말했다.
“선생님은 교장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찾아오도록 해.”
2교시는 음악 시간이었다.
예비종이 울리자 차현승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홧김에 장우현에게 다가가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장우현. 넌 저기 가서 앉아.”
그 말에 장우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을 도와 동생을 돌봐야 해.”
차현승은 이를 꽉 악물었다.
“이 아이 이름은 콩이야. 입만 열면 동생, 동생하지 말아줄래? 누가보면 네 친동생인 줄 알겠네.”
‘친오빠인 나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본 적이 없는데, 피도 안 섞인 남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차현승의 위협에 장우현은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콩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이 오빠랑 같이 앉아도 괜찮아?”
그러자 콩이는 오히려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작은 손을 뻗어 차현승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앉으라고 했다.
그 모습에 차현승은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봤지? 콩이는 나를 더 좋아하니까, 빨리 저리 가.”
그 말에 장우현은 잔뜩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차현승은 콩이 옆에 털썩 주저앉아 콩이가 그린 그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못 그렸어.”
하지만 콩이는 못 그렸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펜을 들고 계속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수업 내내 차현승의 관심은 온통 콩이에게 쏠려있었다. 그는 콩이가 그림을 그리는 것,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까지 전부 눈에 담았다.
‘왜 이렇게 콩이를 안고 싶은 거지? 설마 이 아이가 무슨 마법을 쓸 줄 아는 거 아니야?’
그렇게 차현승이 한창 멍해 있을 때, 콩이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차현승에게 보여주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한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다.
‘어라? 옷이 왜 내 것과 같은 거지?’
그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콩이는 손가락으로 그림 속의 남자 아이와 차현승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림 속의 남자 아이가 바로 차현승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차현승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이를 꽉 악물었다.
“내가 이렇게 못생겼어?”
콩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두 개의 오동통한 작은 손을 차현승의 입가에 갖다 댔다. 그런 다음 손가락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차현승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콩이가 무슨 뜻인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웃는 모습이 더 예쁘다는 뜻이었다.
그의 손길에 차현승은 거부감은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심지어 콩이를 끌어안고 뽀뽀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콩이가 강서현을 빼앗아갔다는 생각에 잠시 누그러졌던 마음이 다시 싸늘해졌다.
그가 또다시 화가 난 것을 보고 콩이는 바로 손을 놓고 묵묵히 그림을 계속 그렸다.
한편, 강서현은 교장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교장뿐 아니라 차재욱도 앉아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교장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 선생님, 어서 앉으세요.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강서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재욱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잠시 후, 교장이 먼저 한마디 했다.
“오늘 이 회의는 강 선생님 반의 장우현 학생을 위해서 연 것입니다. 강 선생님, 어제 직접 그 애를 데려다 주셨는데, 그 학생의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강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작년에 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원래 두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에 이 아이가 가정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학교에 와서 수업도 들어야하고 어머니도 돌봐야 하죠. 현재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영양이 많이 부족한 상태고요. 원래 어제 그에게 돈을 좀 주려고 했었지만 우현이가 거절했습니다. 혼자서도 어머니를 잘 돌볼 수 있다고 하면서요.”
그 말에 치재욱은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열여섯 살의 강서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그녀는 작품 하나로 디자인계를 뒤흔들었고, 여러 외국 대학에서 그녀를 초정했었다. 차씨 가문에서도 해외 유학 비용을 지원해줄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강서현은 그런 제안을 전부 거절했다.
당시 야위고 내성적이었던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기자들에게 말했었다.
“저는 다 컸으니 스스로 제 자신을 돌볼 수 있습니다. 저보다 도움이 더 필요한 아이들을 후원해주세요.”
또한 그녀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차씨 가문이 자신의 보육원을 후원해 온 최대주주라는 사실을 알고 졸업 후 주저하지 않고 바로 강진 그룹에 입사했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에 차재욱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저렇게 착하고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여자가 나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니…’
그는 강서현 쪽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오늘 강 선생님과 이 아이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지 상의하려고 왔습니다. 모든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 것입니다. 강 선생님한테 무슨 좋은 건의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강서현은 차재욱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대놓고 도와주면 아이의 자존심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 우현이가 스스로 노력해서 상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고 그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주 쉬워요. 곧 시험이 다가오니까 학교에 공지를 붙여 전교 3등 안에 든 학생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장우현 학생은 성적이 항상 상위권에 있으니까 반드시 더 열심히 할 갑니다.”
그 말에 차재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하면 학교에서 주는 상금이 너무 많다고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이번 전국 수학 경시 대회를 목표로 삼는 건 어떨까요? 저희 강진 그룹이 최대 스폰서이니 상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메달만 따면 상금을 받을 수 있으니 강 선생님의 협조가 있어야만 이 아이가 메달을 딸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자 강서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제가 꼭 우현이가 메달을 딸 수 있게 도와줄 겁니다.”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하죠. 전 강 선생님과 따로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차재욱이 말했다.
“네. 그럼 두 분께서 얘기 나누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무실 문이 닫히자 차재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서현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강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 아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으니 이제 당신한테 작은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말해봐.”
차재욱은 강서현에게 도화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다음 달 회사 송년회 때 입을 정장을 디자인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