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심장 제세동기! 빨리! 전압 올려!” “선생님! 대출혈이 발생했는데 혈액은행의 A형 혈액이 방금 긴급히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인턴 간호사는 피로 흠뻑 젖은 두 손을 맞잡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 수술실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그녀는 이렇게 많은 피를 본 적 없었다. 이때, 한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체 누가 혈액은행의 혈액을 한꺼번에 움직인 걸까? 병상에 누워있는 여자는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으며 동공은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다. “시언 씨...” “뭐라고요?” “시언 씨...” 인턴 간호사는 두 번째 만에야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 죽어가는 여자는 지금 박시언을 부르고 있다. 해성시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기업 대표, 박시언! 의사는 거의 마음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세 번이나 번호를 잘못 누른 뒤에야 겨우 제대로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 대표님, 사모님께서 대출혈이신데 혈액은행의 혈액이 누군가로 인해 전부 옮겨진 상태입니다. 제발 사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와주세요.” ‘뚜뚜--’ 통화는 무정하게 종료되었다. 문뜩 병상에 누운 여자는 시선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눈앞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박시언... 내가 그렇게 싫었어? 내가 곧 죽는 이 상황에서도 날 보러 오기 싫다는 거야? 이내 기계에서 ‘띠--’하는 차가운 소리가 들려오고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이 순간, 신다정은 자기 영혼이 육체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몸과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극도로 피곤한 표정으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고작 27세의 꽃 같은 나이에 난산으로 그렇게 죽어버렸다. 생전에 그녀는 박시언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신정 그룹의 외동딸로서 워낙 그녀는 최고로 빛나는 삶을 누렸어야 했다. 하지만 박시언을 위해, 그녀는 신정 그룹까지 모두 말아먹고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다정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절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모님, 오늘 대표님과 함께 경매회에 참석하실 텐데 옷은 어떤 걸로 입으실래요?” 유씨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와 신다정은 문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익숙한 광경, 이건 그녀와 박시언의 신혼집이다. 박시언과 결혼한 지도 한 달이 되었건만, 그녀는 박시언의 얼굴을 몇 번 보지 못했다. 그녀는 박시언이 이날 체면을 위해 그녀와 함께 부지 경매회에 참석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그건 분명 5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설마... 환생? “사모님, 두 분 결혼하시고 대표님은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으셨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기회를 잡으세요.” 유씨 아주머니는 순백의 드레스를 그녀에게 내밀며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이걸로 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드레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박시언이 서찬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박시언의 눈길을 얻기 위해 종종 서찬미의 코디를 본떴다. 서찬미가 하얀 원피스를 좋아하니 그녀도 따라 하얀 원피스를 입어가며 남자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리고 이 경매회에서 박시언은 그녀에게 파트너를 바꾼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찬미와 함께 경매회에 참석했고 서찬미와 같은 드레스를 입은 신다정은 제대로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우습다. “아니요, 이걸로 입을래요.” 신다정은 화려한 빨간색의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사실 그녀는 청순한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예전에 그녀는 사랑에 눈이 멀어 가난한 여대생의 싼 티 나는 패션을 따라 하며 자기의 신분을 낮추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유씨 아주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대표님의 취향은 이쪽인데...” 유씨 아주머니의 적나라한 암시에도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거 입을게요.” 신다정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징그러운 흰색 원피스는 전부 버리세요.” “아니...” 유씨 아주머니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분부에 따랐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몇 년 뒤면 그녀는 박시언에게 시달려 완전히 빛을 잃게 된다. 그 전에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직접 끝내려고 한다. 저녁 무렵, 신다정은 몸매 라인이 완벽하게 드러난 와인색 머메이드 드레스에 정교한 메이크업, 세련된 웨이브 헤어로 나타났다. 눈 밑의 점은 그녀의 섹시함을 한껏 더 돋보이게 했는데 이 순간 그녀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감히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흰 셔츠에 긴 가죽 군화를 신은 채 담배를 꼬나문 남자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여자 누구야?” “너 저 여자 몰라? 신정 그룹 딸 신다정, 얼마 전 박시언과 결혼한 여자잖아!” 지태준 옆에 껄렁한 자세로 서 있던 명문가 도련님 반지훈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 “나 방금 박시언 그 새끼 다른 여자와 함께 온 거 봤어. 어쩌면 이따가 정부인과 세컨드의 세기의 싸움을 볼 수도 있겠다. 아, 생각만 해도 꿀잼이야.” 하지만 지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반지훈이 계속 말했다. “아니 근데 박시언 안목 정말 젬병이네. 저렇게 예쁜 마누라를 놔두고 왜 그리 비쩍 마른 갈비 같은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거지? 안 그래, 태준아?” 반지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태준은 이미 저만치 걸어갔다. “야, 지태준! 이 의리 없는 새끼야!” 반지훈은 욕설을 퍼부으며 지태준을 따라 경매장에 달려갔다. 경매장 입구.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서찬미는 박시언의 팔짱을 끼고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근데 저 한 번도 이런 자리에 와본 적 없어서 너무 걱정돼요. 저 그냥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박시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천천히 익숙해져야지. 앞으로 이런 자리는 점점 더 많아질 거야.” 서찬미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시언과 서찬미가 경매장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참다못한 이비서가 물었다. “대표님, 사모님 조금만 기다리는 건 어떨까요?” 박시언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오지 말라고 연락하라고 했잖아.” 이 비서가 서찬미를 힐끔 보자 서찬미가 다급히 설명했다. “이 비서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저 같은 애가 대표님 옆에 있으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까 봐서요. 그래서 그냥 다정이 언니가 옆에 있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겁에 질린 토끼처럼 고개를 푹 숙인 서찬미의 모습에 박시언은 미간을 짓눌렀다. 그는 이 장소에 신다정이 나타나길 바라지 않았다. “대표님...” 서찬미는 입을 오므린 채 조심스럽게 박시언을 불렀다. “됐다. 네 잘못이 아니야.” 박시언은 서찬미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이 비서에게 분부했다. “입구에 지키고 있다가 바로 돌려보내.” 이때, 사람들 속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 비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근데... 이미 늦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