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강서우는 실크 잠옷을 걸친 채 거대한 통유리창 앞에 서서 창밖에 반짝이는 별들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정략결혼 말이에요. 저 할게요.”
전화 건너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곧 강준하의 기쁨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우야, 언제 돌아오니? 아버지가 데리러 갈게.”
오래간만에 듣는 다정한 목소리에 강서우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다음 주 월요일이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자마자, 강준하는 밖에서 만나던 여자와 딸을 집으로 들였다.
강서우는 그들이 미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피하며 살 수는 없었다. 특히 어머니가 남신 회사만은 절대 그들에게 공짜로 넘길 수 없었다.
예전에는 박민재를 위해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이제는 복잡하게 얽힐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것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박민재를 떠올리자 가슴이 다시 쿡쿡 쑤셨다.
시간을 저녁 여덟 시 반으로 돌려서, 강서우는 직접 만든 음식을 식탁 위에 차려놓는 중이었다. 그때 박민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회사에 일이 있어. 기다리지 마.]
메시지 창을 확인한 강서우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오늘은 그녀의 23번째 생일이자, 박민재와 함께한 지 5년째 되는 날이다.
저녁 여섯 시부터 줄곧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보냈지만 통하지 않았다. 메시지 열 번에 겨우 바쁘다는 답장 하나가 왔다. 대화창은 그녀 혼자만의 독백 같았다.
[나 토마호크 스테이크 주문했어.]
[꽃은 장미랑 백합 샀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와인이야. 오늘 오후에 직접 구해왔어.]
[내가 치자꽃 향초도 만들어놨어. 오늘 밤에 같이 써보자.]
...
13년 동안 박민재는 그녀의 생일에 한 번도 빠진 적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조금 전 메시지가 온 시간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알림이 뜨면서 새로운 글이 보였다.
[오래도록 기다린 VIN의 연주회]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한 남녀가 다정하게 붙어 서 있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남자의 다이아몬드 커프스가 또렷이 보였는데, 거기에는 그녀가 특별 주문했던 치자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박민재가 가장 좋아하는 문양이었고, 온 구름시에서 유일무이한 디자인이었다.
강서우는 휴대폰을 꽉 쥐고 사진을 확대했다 축소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눈이 시큰거리고 아플 때쯤에야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헐떡이는 심정이었다.
VIN의 전국 투어가 시작되자마자 그녀는 티켓을 샀다. 연주회 티켓이 가장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이라는 말도 한 적 있다.
박민재는 같이 가자고 약속해 놓고 공연 직전에 그녀를 바람맞혔다. 그런데 오늘 그녀의 생일날에 유송아를 데리고 연주회에 갔다.
고통은 심장으로부터 온몸에 퍼졌다. 이제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어릴 적 몸이 안 좋았던 그녀는 10살 때 서경시에서 구름시로 옮겨와 요양했다. 그때 박민재와 만나게 됐고, 그를 위해서라면 몸이 좋아져도 서경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2살 위인 그는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녀를 지키고 아껴주며 함께해줬다. 그녀가 18살이 되던 생일날, 그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고백하며 평생 그녀만 사랑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변해버린 걸까?
아마 그녀가 유송아의 팔을 붙잡고 박민재에게 소개해 주던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여리고 순수한 소녀는 겁먹은 듯 부드럽게 말했다.
“선배님, 저는 서우 씨의 도움을 받는 가난한 학생이에요.”
절벽 위의 백합처럼 꺾이지 않는 분위기가 그의 보호 본능을 자극해 버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박민재는 강서우와 유송아 중 한 명을 택해야 할 상황이 오면, 10번 중 9번은 유송아를 선택했다.
강서우가 여러 번 그 일로 소동을 벌였지만, 박민재는 늘 인상을 찌푸리며 실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송아는 몸이 안 좋잖아. 걔는 너만큼 뭐든 잘하지 못해. 그러니까 괴롭히지 마.”
몸이 안 좋으면 남의 남자친구까지 빼앗아도 되는 걸까?
그때 탁자 위 휴대폰이 연달아 진동했고 강서우는 서둘러 확인했다. 순식간에 세 통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VIN의 연주회 너무 좋았어요. 민재 오빠가 다 알아봐 줘서, 저 연주회가 끝나면 제자로 받아달라고 VIN을 찾아갈 거예요.]
[오늘 언니 생일 맞죠? 민재 오빠한테 얼른 돌아가라고 했는데, 저 혼자 밥을 안 먹는다고 같이 있자고 해요. 언니가 전화를 너무 많이 하니까 귀찮다고 휴대폰까지 껐어요.]
[이건 민재 오빠가 준 선물이에요. 언니, 제 옷이랑 어울리는지 한 번 봐줄래요?]
곱게 빛나는 무지갯빛 다이아몬드 팔찌. 명품 브랜드의 이번 시즌 신상이라 사전에 예약해야만 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예전에 광고를 봤을 때, 강서우가 박민재에게 언급한 적 있다. 그는 결국 그걸 샀어도 강서우에게 주지는 않았다.
강서우는 휴대폰을 조용히 내려놓고 혼자 초를 켜서 생일을 보냈다. 그리고 남은 음식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렸다. 보름 동안 공들여 배워가며 만든 케이크까지 모두...
다음 주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떠나기로 한 건, 지난 13년 동안 박민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든 생활적으로든 단칼에 끊어내긴 쉽지 않았다. 그러니 시간이 필요했다.
몽롱하게 잠이 들 무렵, 누군가가 침대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 서늘한 손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누르며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사랑아, 미안. 내가 늦었지. 이건 네 생일 선물인데 마음에 들어?”
그녀는 방해를 받아 눈을 찌푸리며 떴다.
남자는 검정 셔츠만 입고 겉옷은 어디에 벗어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그 모습에 화사한 표정까지 더해지니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눈동자는 사람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깊었다.
강서우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가 건네주는 상자가 열리는 것을 지켜봤다. 안에는 무지갯빛 다이아몬드 팔찌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전부터 갖고 싶어 했잖아? 내가 채워줄게.”
박민재가 막 팔찌를 꺼내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상자를 침대 위에 내려두고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어쩌다가 넘어졌어? 많이 다쳤어? 울지 마. 지금 바로 갈게.”
그는 급했는지 강서우에게 아무 말도 못 한 채 뛰쳐나가 버렸다.
“민재야...”
강서우가 힘없이 불러봤지만 방문은 이미 닫혀버렸고 박민재는 돌아보지 않았다.
몇 분 후, 예상했던 대로 유송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팔찌 받았어요? 그거 꼭 받아줘요. 제가 한참 졸라서 오빠가 겨우 선물하기로 한 거니까요. 민재 오빠가 저한테 착하다고 하면서 연주회 끝난 뒤에 하나 더 산 거예요.]
[이 팔찌 의미가 좋더라고요. 사랑받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거라는 의미예요.]
이는 브랜드의 대표 커플 팔찌였다.
박민재가 회사를 세우던 해, 그는 그녀를 데리고 이 팔찌를 구경하러 갔었다.
그때는 회사 자금이 부족해서 프로젝트 몇 개를 시작하려면 강서우의 어머니가 남긴 도자기 두 개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가 빚을 지는 것을 원치 않아 아깝지만 팔아줬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안정된 뒤에도 박민재는 이 팔찌를 다시 사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성공해서 돈이 들어온 후, 강서우는 그 도자기들을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이름 모를 구매자가 고가로 사 갔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날 밤, 박민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그녀는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며 다시 한번 유송아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