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오현주는 임유나가 비행기 사고로 실종된 이듬해 결혼했고 3년 후에 이혼한 뒤 지금까지 혼자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결혼했던 사람은 임유나도 알고 있는 두 사람의 대학 동창, 임승호였다.
이혼 후 오현주는 일에만 몰두하며 노스스타 컴퍼니를 번창하게 운영해 나갔다.
“오현주가 이혼한 지 2년 후에 네 명의로 되어 있는 지분을 되사겠다고 제안했어...”
오현주는 임유나를 내세워 감정적으로 접근했고 이는 임유나의 뜻이기도 하다는 식으로 설득했다. 강시후는 결국 동의했다.
“오현주는 그동안 나에게서 많은 이득을 챙겼어.”
강시후는 임유나를 품에 안고 볼을 비비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매번 뭔가 부탁할 때마다 네 얘기를 꺼내곤 했어. 내가 모르는 너에 관한 일들을 말해주면서.”
“자기는 그게 티 안 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냥 속아준 거야. 네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
15년 동안 임유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강시후에게는 힐링 타임이었다.
“유나야, 내가 오현주 이야기를 꺼낸 건 네가 마음의 준비를 했으면 해서야. 넌 여전히 예전 그대로지만 네 주변 친구들은 네 기억 속 모습 그대로가 아닐 수도 있어.”
강시후의 말은 임유나에게 지금 친구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돌려서 전하는 것이었다.
과거에 겪은 상처 때문에 강시후는 함부로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임유나의 성격을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한때 친구 문제로 인해 두 사람이 헤어질 뻔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강시후는 임유나 주변의 모든 남자 친구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임유나가 그들과 조금이라도 엮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시후는 혼자 질투에 사로잡혔다.
처음엔 임유나도 귀엽게 받아들이며 달래주었지만 갈수록 강시후가 지나치게 구는 모습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강시후는 지금도 그때 임유나가 했던 말을 잊지 못했다.
“강시후, 난 너를 사랑해. 하지만 그 사랑이 나 자신을 잃어가는 대가라면 그 사랑은 가벼워지고 나는 결국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임유나는 그 말을 담담하게 했지만 강시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는 임유나가 친구를 사귀는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임유나의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던 오현주를 언급할 때도 조심스럽게 말했고 표현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랐다.
상의를 하듯 부드럽게 말했을 뿐, 강압적인 태도는 조금도 없었다.
“알아. 온라인에서 떠도는 얘기들 나도 봤어.”
임유나는 강시후의 얼굴을 만지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오현주가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
임유나는 강시후 품 안에서 웅크린 채 조금은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현주와 만나 식사 약속을 잡았던 사이였는데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진 듯했다.
자신이 15년 동안 호구처럼 이용당해 왔고 그로 인해 오현주는 강시후에게서 수많은 이득을 얻었다는 사실이 상처로 다가왔다.
“그래. 유나 네 뜻대로 할게.”
“그나저나 내가 갑자기 나타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솔직히 사람들이 날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
강시후는 임유나를 안으며 등을 다독였다.
“다른 사람들이 묻더라도 설명할 필요 없어. 그동안 해외에서 요양하고 있었다든지 적당히 둘러대면 돼. 그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
임유나는 강시후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너 보호할게.”
강시후는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고 두 사람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마치 대학 시절 수업이 없던 오후에 운동장 잔디밭에 누워 구름을 바라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시후야, 다행히도 넌 변하지 않았어. 널 잃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임유나는 강시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애교스럽게 몸을 흔들며 끌어안았다.
강시후는 웃으며 그녀를 다시 꼭 안아주었고 고개를 숙여 임유나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마음에는 깊은 애정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길고 검은 속눈썹 아래 그의 눈동자는 짙은 감정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임유나는 며칠 동안 정말 바빴다.
15년 만에 바뀐 세상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즘은 기술이 워낙 발달해서 몇 년만 지나도 모든 것이 확 달라진다는데 하물며 15년이나 지난 지금 세상의 변화는 그야말로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구나 싶어 감탄할 따름이었다.
임유나는 마치 게임에 갓 들어온 새로운 플레이어처럼 강시후라는 NPC를 따라 초보자 마을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큰아들인 도하가 연락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들이 전혀 연락이 없었다. 참다못한 임유나가 먼저 전화를 걸어보려 할 때 강시후가 그녀를 말렸다.
“도하는 요즘 교수님과 과제 준비하느라 바쁜가 봐.”
이 말을 들은 임유나는 아들이 바쁜 걸 이해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또 일주일이 흘렀다.
그러던 중 강로이가 귀국했다.
사실 강로이는 이틀 뒤에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미리 학교를 떠나 깜짝 방문을 택했다. 갑작스레 귀국한 이유는 그 여자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로이는 최근 아빠에게서 16억 원을 얻어내지 못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빠가 자신에게 돈을 주지 않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강로이는 평소에 돈을 펑펑 쓰는 편이라 따로 저축하는 습관도 없었다. 아빠가 일정 금액을 주면 맘껏 쓰고 다 쓰면 또다시 돈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이번에도 차를 사기 위해 16억이 필요했지만 결국 아빠로부터 지원받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돈을 주지 않은 이유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고민하던 중 강로이는 사촌 이모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아빠가 새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 여자가 문제의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이 소식에 그녀는 일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아빠가 새엄마를 들인 후 새엄마가 동생을 낳고 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간질을 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아주 치졸한 방법들로 말이다.
결국 강로이는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장 돌아가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출발하지도 못한 강로이에게 한규진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플로리아 레스토랑 2층 룸에 와. 한 시간 안에 오지 않으면 한규진 다리를 부러뜨리겠다.”
“뭐라고요? 당신들 감히 그런 짓을 해요? 지금 당장 갈게요!”
강로이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 떠났다. 다급한 마음에 눈가가 붉어졌다.
“나 이미 오현주 차단했어. 아마 내 생각엔 그 여자는 네가 차단한 줄 알걸. 어차피 난 그쪽이랑 엮이고 싶지 않거든.”
임유나는 2층 흔들의자에 누워 포도를 먹으며 말장난을 하듯 귀엽게 대꾸했다.
전화기 너머에는 강시후가 있었다.
임유나와 며칠을 함께 지내며 휴식한 후 회사에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출근해야 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나 나오는 한가한 대표님은 현실에 없었다. 회사 전체 직원들 생계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아 있기에 일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 강시후는 야근을 해야 해서 조금 늦게 집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둘은 오현주 얘기도 잠시 나눴다. 강시후가 오현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지만 연락을 피하고 싶어 임유나에게 차단해도 괜찮은지 물었다.
임유나는 당연히 상관없다고 했다.
사실 임유나는 이미 오현주를 차단한 지 오래였다.
강시후와 잠시 더 통화한 후 임유나는 통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려고 했다.
막 침대에 눕자 김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아가씨가 귀국했습니다. 흥안구 쪽 경찰서에서 전화가 와서 아가씨를 보석하려면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강시후가 집안일은 임유나에게 다 맡겼으니 전화를 받은 김 집사는 고민 끝에 새 사모님인 임유나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임유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며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귀국이라니? 경찰서라니? 보석이라니?’
이 모든 단어가 합쳐지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사모님, 대표님께 가서 말씀드릴까요?”
김 집사가 물었다.
임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강시후가 가도 결국 사람을 보석시키러 갈 뿐이라 자신이 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며칠 동안 임유나는 계획을 세웠다.
세 아이가 모두 성격이 달랐기에 도하와는 다른 방식으로 쌍둥이 남매와 재회해야 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몽땅 뽑아 가도 쌍둥이 남매는 DNA 검사를 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DNA 검사 결과가 눈앞에 있어도 위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괜찮아요. 제가 처리할게요.”
그녀는 먼저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다.